설교

2020-05-31 주일예배 (욥과 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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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영호 작성일20-05-31 10:37 조회6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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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과 요나

                                                 고전 3: 10-15

 한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시가 있습니다. 단 세 줄로 된 시인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에 감동을 받아 이분의 시비에 이 시가 쓰여져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시를 읽으며 남녀간의 연인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초등학교 교사였습니다. 시골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옛날 시골 아이들이 얼마나 지저분합니까? 노란 코가 흘러내리고 머리에는 이가 득실득실하고 어디 하나 예쁜 데가 없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예쁘더라는 겁니다. 오래 보니까 사랑스럽더라는 겁니다.  

 

 나태주 시인은 공주중앙교회 집사님입니다. 2007년 교장으로 은퇴하려던 차에 갑자기 쓸개가 터졌습니다. 쓸개 액이 배안의 장기 사이로 스며들어 창자와 장기를 녹였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100일 넘도록 물 한모금 넘기지 못했습니다. 장기가 녹아내려 의사선생님이 99% 사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단 1%. 병상에서 드린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녹아내린 장기를 다시 그대로 엉겨 붙게 하셔서 살려주셨습니다. 그렇게 6개월 만에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로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고난의 길을 가길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때론 우리를 고난의 길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가시밭길로 십자가의 길로 이끄실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별다른 죄된 삶을 산 것 같지 않은데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어느 날 찾아옵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이 정도의 형벌은 나에게 너무한 것 아니냐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경 속 고난의 인물인 욥을 생각합니다. 

 

 욥은 아브라함과 동시대의 사람입니다. 욥이라는 이름에는 고난 받는 자, 울부짖는 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욥은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 그렇게 고난받을 만한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방의 의인이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데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그에게 닥쳐왔습니다.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고 아들 일곱 딸 셋이 집이 무너져 깔려 죽었습니다. 몸은 온갖 악성 피부병이 발해 다 죽어갑니다. 고난 중에 욥은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러실까? 끊임없이 의문을 갖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에 순종합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 21) 

 

 이런 욥에게 세 친구가 위로하러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세 친구의 위문이 욥에게는 위로가 되질 않습니다. 세 친구가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이런 고난을 받는 것은 분명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욥은 이런 형벌을 받을만한 죄가 생각나질 않는 겁니다. 사실 욥의 고난은 욥의 죄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욥의 세 친구는 세상적인 잣대를 가지고 욥을 정죄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군가가 고난에 빠지면 먼저 정죄부터 합니다. 저 사람 분명 죄를 지었을 것이다. 지금 벌을 받는 것이다. 요한복음 9장에도 나면서부터 맹인인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우리도 종종 욥의 세 친구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실수를 범 할 수 있습니다. 내 주변의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위로하고 격려하기에 앞서 그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부터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 욥을 기억하십시오. 나면서부터 맹인인 사람을 기억하십시오. 많은 고난이 죄 값으로 오지만 그렇다고 모든 고난이 죄 값인 것은 아닙니다. 욥처럼 나면서부터 맹인인 이 사람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에 빠졌을 때 자기 스스로 자신을 정죄부터 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그분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욥일 수 있습니다. 욥기 42장을 보시면 하나님은 욥이 고난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한 후에 욥에게 처음의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면 욥처럼 갑절의 복을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었다면 요나는 욥과는 완전히 다른 성향을 가진 분입니다. 요나라는 이름의 뜻이 비둘기입니다. 비둘기를 생각할 때 온순하고 순종하는 새로 생각됩니다. 노아가 세상을 뒤덮었던 홍수가 끝났는지 알아보려고 먼저 까마귀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까마귀가 돌아오질 않는 겁니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시체를 먹느라 그랬을 겁니다. 하는 수 없이 노아가 이번에는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비둘기가 뭘 물어옵니까?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비둘기는 이처럼 순종하는 새입니다. 그런데 비둘기라는 이름을 가진 요나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요나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불순종한 요나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나오지만 요나와 같은 선지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어떻습니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하십니다. 하지만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 싫습니다. 그래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고 욥바로 내려가 니느웨와 정 반대편에 있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다시스가 어딘지 아십니까? 오늘날 스페인입니다. 요나가 살고 있는 이스라엘에서 스페인까지 4000킬로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그런 먼 길을 선택한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선지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동시대의 선지자로 호세아도 있고 아모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물고기 뱃속에 3일을 가두심으로 요나의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뼈가 녹아내리는 고통을 겪은 요나가 어쩔 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는데 원래 니느웨는 걸어서 사흘을 돌아야 한바퀴 돌 수 있는 큰 성인데 요나는 하룻길만 다니며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도 니느웨에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하나님은 이런 니느웨의 죄를 사면해 주셨습니다. 요나가 이런 하나님께 거세게 항의합니다. 왜 저 악한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해주냐는 겁니다. 요나서 4장을 읽어보면 요나만큼 막장 선지자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선지자도 하나님을 이렇게 함부로 대한 적이 없습니다. 요나가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자신을 가려주던 박넝쿨을 벌레가 갉아먹어 버리자 하나님께 막 화를 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막장도 이런 막장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선지자에게도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이라면 이런 요나를 버려버리고 다른 사람을 선지자로 쓸 것 같은데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불순종한 요나를 끝까지 쓰셨을까요? 그 답을 오늘 고린도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3장 10절에서 15절을 여기 본문만을 읽으면 잘못해석 할 수 있습니다. 3장 1절부터 읽으셔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해 세운 교회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바울은 한곳에 오래 머무는 분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떠난 후 아볼로가 고린도교회에 와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교회에 분쟁이 생긴 겁니다. 교인들이 네 개의 파로 갈라졌는데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입니다.  이런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교회의 터를 닦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지으려면 먼저 터를 닦아야 하잖습니까? 그런데 그 터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란 겁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도록 했다는 겁니다. 이 터 말고 다른 터에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11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외에 다른 터는 없다는 겁니다. 운암신안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줄로 믿습니다. 자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를 세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를 닦았습니다. 이제 아볼로든 디모데든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건물을 세워야 하는데 두 가지 재료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같은 영원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나무나 풀이나 짚 같은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여기서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하나님 말씀과 기도와 같은 영적인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나무나 풀이나 짚은 오늘날 교회에서 쓰는 각종 이벤트나 프로그램 같은 세상적인 방법을 말할 것입니다. 물론 모든 프로그램이 다 나무나 풀이나 짚 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적으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교회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운 교회가 많습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세운교회든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운 교회든지 모두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만 세워졌다면 버림받는 교회, 버림받는 성도는 없습니다. 

 

 오늘 날 교회는 아주 그 모습이 다양합니다. 제자훈련 하는 교회, 각종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는 교회, 전도대회, 부흥회 스타일의 목사님, 스타목사님, 치유목회, 문화교실 등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부흥을 꿈꿉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세상 끝날 마지막 때 심판이 있다는 겁니다. 무엇으로 심판하신다 하셨습니까? 불로서 심판하는데 이 불은 먼저 아실 것은 지옥불이 아닙니다.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이 불이 지옥 불이라면 구원을 못 받습니다. 지옥 불이 아니라 심판의 불입니다. 여기서 심판은 구원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심판입니다. 구원에 대한 심판은 이미 받았습니다. 언제 받았느냐?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울 때 이 구원받은 겁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 신앙의 터입니다. 내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웠는지를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워져 있다면 설령 여러분이 요나와 같을지라도 구원받습니다. 솔로몬 보십시오.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까? 나중엔 우상에게 절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구원받았습니다. 왜냐? 그의 신앙을 하나님의 터 위에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회개의 은총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구원, 요나의 구원은 오늘 바울 사도가 말하는 부끄러운 구원일 것입니다. 구원은 받되 불 가운데 구원받았습니다. 천국에 상이 없다는 겁니다. 

 

 요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고난의 길을 가지 않으려고만 했습니다. 고난이 싫다는 겁니다. 힘든 일이 싫다는 겁니다. 믿기는 믿지만 편하게 믿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달아나는 겁니다. 하지만 욥을 보십시오. 고난에 적극적으로 대처합니다. 고난에 물러서지 않습니다. 달아나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그리고 끝내 고난과 싸워 승리합니다.   

 

 저는 청년 때는 요나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하나님께도 막 화도 내고 항의하는 요나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요나야 말로 진짜 하나님 자녀의 모습 아니겠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지금은 욥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욥입니까? 요나입니까? 성경은 끝을 보아야 합니다. 욥기의 끝을 보면 욥은 처음보다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요나서 마지막 장을 보면 요나는 하나님과 싸우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나는 구원은 받았지만 부끄러운 구원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욥처럼 살아야 합니까? 요나처럼 살아야 겠습니까? 욥처럼 사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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